‘지위가 높아져도 내 일정을 통제하거나 뜻대로 되지는 않더라.’ ‘큰 가치도 못 내면서 이 회의 저 회의를 쫓아다니는 것 같다.’ ‘통제력 없이 회의에서 허수아비 노릇만 하는 느낌이다.’

필자가 컨설턴트로 만난 최고경영자(CEO)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요약하면 수많은 회의 때문에 효과적인 시간관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지 않지만, 사전에 회의의 성격을 범주화하고 정의해 놓으면, CEO가 참석해야 할 회의를 선별할 수 있다.

회의 목적을 5가지로 범주화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권고(Recommendation) 회의다. 이때 경영진의 역할은 의사결정 당사자(최고경영자)에게 무엇인가를 권고하는 것뿐이며, 결정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권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듣고 통합해야 한다. 경영진이 청취한 의견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관점을 나타내므로, 의견을 단순히 전달만 하는 것은 권고라 할 수 없다.

둘째 유형은 의견 제시(Input) 회의다. 경영진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토대가 되는 타당한 사실들을 제공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때 나오는 의견은 말 그대로 의견일 뿐, 권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셋째 유형은 동의(Agree) 회의다. 이 회의는 단순히 타인이 내린 의사결정을 승인하는 것이다. 물론 승인을 거부할 수도 있다. 해당 의사결정이 법과 절차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준법 감시나 각 규정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넷째 유형은 의사결정(Decision) 회의다. 이 회의에서 경영진 또는 최고경영자의 역할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모든 의견을 다시 되짚어 보며 또 다른 옵션을 모색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한다는 것은 의견 제시 회의(I)와 권고 회의(R)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R·A·I·D를 모두 거친 후 마지막 단계의 회의로 해당 결정을 실행(Perform)하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 이때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최종적 역할이 주어지는데, 구성원들이 특정한 기능과 업무를 수행하도록 배정해야 한다. 기억을 돕기 위해 이를 ‘RAPID’로 명명해보자. 이런 범주화는 단순하고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조직 내에서 이렇게 회의를 매번 정의하는 것은 난해할 뿐 아니라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회의의 목적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에서 흔히 나타나는 3가지 현상이 이런 범주화의 장애 요인이 되기도 한다.

첫째, R·A·I·D가 모두 한 사람(주로 기업 오너)에게 집중돼 있는 경우다. 경영진은 모든 주요 회의에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경영진 자신을 포함해 모두의 시간을 허비할 뿐이다. 오너가 모든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원맨쇼는 중소기업에서 특히 자주 찾아볼 수 있지만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둘째, 의사결정 사안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 의견 제시는 활발하나 누구도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경우다. 만장일치가 필요한 경우라면 결국 누구에게도 결정권은 없다. 구성원들이 책임을 공유하고, 따라서 누구도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 이런 조직은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CEO의 회의 고민이 왜 생기나 생각해보자. 상기한 5가지 회의에 모두 참석하려 하거나, 짧은 회의 1~2번으로 5가지 목적을 모두 수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회의가 너무 많아 피곤하게 느껴질 때는 회의를 범주화할 것을 권한다. CEO가 참석하는 회의의 70%는 D 또는 P 범주에 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