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트윈타워에서 옮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또 짐을 싸게 생겼어요. 지난해 말부터 팀 조직도 여러 차례 바뀌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방으로 안 가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죠.”

LG전자 MC(모바일커뮤니케이션즈)사업부 A차장의 푸념이다. LG전자는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에 있던 MC사업본부 일부 조직과 인력을 서울 가산동으로 연내에 옮기기로 했다. 가산동에는 LG전자 MC연구소가 있다. 구본준 부회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MC사업부를 맡은 박종석 부사장은 MC연구소장 출신. 앞서 A차장은 “흩어져 있던 조직을 한곳에 모아 역량을 강화하고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조치로 보인다”고 했다. LG전자 관계자는 “MC연구소와 인근의 가산 R&D 캠퍼스를 LG전자 휴대전화사업부의 중심축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구본준 부회장 체제가 들어선 지 2달 정도 지난 후, LG전자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구본준 부회장 직속으로 혁신팀과 6(식스)시그마팀을 신설하고 모바일커뮤니케이션즈사업본부에 제품 개발 담당을 새로 배치하는 등 일부 조직 개편에 이어, 일부 직원들의 사업장 배치와 6시그마 등 다양한 혁신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 연말 인사에선 대대적인 물갈이와 함께 조직 개편이 이어질 전망이다.

현장경영

LG전자의 서울 본사는 LG트윈타워다. 하지만 사업장은 평택과 청주사업장, 구미사업장, 창원 공장, 서울 가산동 등에 산재해 있다. TV를 개발하는 LCD 연구소는 평택에, PDP 연구소는 구미에 있다. 과거 김쌍수 부회장 시절에는 TV와 모니터사업을 맡고 있는 HE사업본부는 구미에, 백색가전을 맡는 HA사업부와 에어컨사업부의 헤드쿼터는 창원에 있었다. 하지만 남용 부회장 때는 각 사업본부의 지원인력을 서울로 모았다.

하지만 현장경영을 강조하는 구본준 부회장의 스타일상 지방의 헤드쿼터별로 조직과 인력을 현장에 집중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서울 근무인력의 지방 사업장 이동도 점쳐진다.

구본준 부회장은 취임 직후 5명의 사업본부장에게 현장경영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서울 여의도 본사보다는 사업장 등 현장에 출퇴근하며 조직 내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것을 강조했다. 현장 아이디어가 제품 출시까지 빠른 속도로 진행되도록 조직 개편안을 마련할 것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도현 LG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도 기업설명회를 통해 “경쟁력 있는 제품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 조직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시장대응 및 신속한 의사결정, 강력한 실행을 위해 사업 중심의 조직정비를 진행 중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현장경영과 함께 LG전자에 4년 만에 돌아온 화두는 ‘6시그마’.

구본준 부회장은 지난 11월 초 ‘6시그마팀’을 직속조직으로 신설했다. 취임 직후 계열사 사업장을 순회하며 경영혁신기법인 ‘6시그마’를 새롭게 적용할 것을 지시했다. 6시그마는 한때 LG전자 품질경영의 상징이었다. 6시그마는 LG전자가 96년 도입한 후 TV·냉장고·에어컨 분야 등을 시장점유율 세계 1~2위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6시그마 전도사’로 불리던 김쌍수 부회장이 2007년 초 물러나면서 전담부서가 폐지됐다. 남용 부회장(지난 9월 퇴임)이 6시그마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일부 공장 라인을 제외하고는 활동이 거의 중단됐다.

생산뿐 아니라 제품 개발 단계에도 6시그마를 적용해 애플의 ‘아이폰’과 같은 혁신적 IT 제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게 구 부회장의 생각이라고 LG전자 측은 설명했다. 6시그마 강조는 최근 LG전자가 컨설팅사인 맥킨지와 결별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남용 전 부회장은 맥킨지 컨설팅의 신봉자로 유명했다. 지속적으로 맥킨지 컨설팅을 통해 의사결정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맥킨지 출신 외국인 임원들도 여럿 영입했다. 브래들리 갬빌 최고전략책임자(CSO)가 대표적이다.

구 부회장은 그러나 LG전자 대표로 취임하면서부터 형성된 맥킨지 등 외부 컨설팅업체들과의 관계도 청산할 것을 지시했다. 조직 구성원보다 산업이나 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외부 컨설팅업체들의 판단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게 구 부회장의 판단이다. LG전자 측은 대신 내부 컨설팅을 활성화하고, 전사 차원의 컨설팅보다는 필요한 때 소규모로 외부 컨설팅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피드경영

내부 컨설팅 활성화와 조직 개편 등은 의사결정 시간 단축 등 스피드경영과도 무관치 않다.

스마트폰 대처가 늦어지면서 LG전자가 어려움에 빠지게 된 데는 외부 컨설팅업체의 보고나 시장조사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LG전자 안팎의 소문이다. 삼성의 ‘바다’와 같은 자체 플랫폼 개발이나 빠른 제품 출시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 등 외부 업체와의 제휴 등에 기댔다는 것. 또한 스마트폰시장의 성장세를 간과하다 초기 제품 개발 착수시기를 놓치다 보니 현재도 경쟁사보다 몇 달씩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도 애플 ‘아이폰’ 등 스마트폰의 위력을 간과했던 맥킨지 등 외부 컨설팅업체의 보고서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의사결정 단계를 줄이고 내부 팀워크와 스피드를 강조하는 쪽으로 기업문화를 바꿔나갈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남용 부회장이 실시했던 영어 공용화가 의사결정을 늦추는 원인 중 하나였다는 지적에 따라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남용 부회장 시절 국외 각 법인으로 파견했던 지역비즈니스리더 등의 조직 일부도 국내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들은 지역 맞춤형 마케팅과 제품 전략을 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지 법인과 조직이 중복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전망은

LG전자 내부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4년 전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앞서 LG전자의 직원은 “모든 게 남 전 부회장 이전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현장과 스피드를 강조하는 경영방침은 당장 스마트폰을 필두로 회사의 실적을 끌어올려야 하는 절박감과 무관치 않다. 구 부회장이 연말 정기 인사를 앞두고 다양한 혁신방안을 통해 빠른 해법을 찾아내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현장 혁신을 통한 품질 강조와 조직 내 팀워크를 중시하는 원래의 ‘LG 스타일’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직원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영업과 생산 현장에서는 구 부회장의 혁신을 반기는 분위기다. 전략경영과 마케팅을 중시하는 분위기보다는 품질과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떨어지는 실적을 반전할 수 있다는 것. 반면 남용 부회장 시절 영입된 임직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케팅, 외국 임원들이 맡았던 본사 스태프 조직 등 축소가 거론되면서 입지가 좁아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LG전자 MC사업부의 한 연구원은 “6시그마 등 품질경영은 현장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면서 “빠른 의사결정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스마트폰 개발 과정에서 우왕좌왕했던 올해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 외국인 C레벨 임원들은…
사실상 구조조정 대상

마케팅 전문가였던 남용 전 부회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임원들을 상당수 영입했다. 이 중에는 소위 C레벨로 불리는 최고위임원 5명도 포함돼 있다. 그간 마케팅을 총괄해 왔던 더모트 보든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11월로 3년 임기가 만료된다. 또한 토마스 린튼 최고구매책임자(CPO)와 디디에 쉐네브 최고공급망관리책임자(CSCO)역시 내년 1월과 3월 임기가 끝난다. 이 중 디디에 쉐네브 CSCO는 사퇴 의사를 밝히고 송별회를 연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외국인 임원들은 임기가 남았지만, 조직개편 과정에서 역할이 축소되거나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LG전자 안팎의 견해다. C레벨에는 피터 스티클러 최고인사책임자와 맥킨지 출신의 브래들리 갬빌 최고전략책임자 등이 남아 있다.